지적 오만

어느 히피족 간첩의 고백

산책길에서 2010. 12. 31. 10:52

그때는 나도 히피족이 되고 싶었었다.

 

맨첨부터 강렬하게 마음 땡겼던 이유가..예의 그 지저분한 빈티지 옷차림 때문이었던 것 같다.

발머리 수염 청바지 벨트 목거리 마리화나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을 붙들었던 것은 그런 히피청년 옆에 앉아있는 웨이브진 긴머리 짧은치마의 여자친구.

캐럴 킹(60년대 유브갓어프렌드 부른 여 가수) 같은 여자친구.

 

세상이 만든 어설픈 질서대로 넋놓고 끌려가서야 되겠는가.

어처구니없는 논리로 만들어진 엉성한 거미줄에 포박되어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적어도 거부하고 저항했어야 옳다.

인간으로 태어나 모름지기 인간의 순수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

소외되는 인간군상을 만들어 내는 그들의 매뉴얼이 아닌 절대 존엄한 내 의지로 살아야 한다.

독존적이며 하늘이 부여한 존엄한 가치인 나의 자유의지가 우선이다.

그건 내가 세상 살아오면서 절감한 가장 단순명쾌한 철학이요,내가 평생 신봉하는 이데오로기이다.

히피족..그들은 그 철학에 가장 가까운..위대한 사상가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순수는 다수의 야심가들에 의해서 폄훼되기 일쑤였다.

히피족 = 프리섹스..수치심 모르는 색정광이라고 욕했다.

그 옛날 짚시들이 마녀급으로 낙인 찍혀 민족 말살을 당했던 그런 수준으로 그들도 그렇게  핍박을 받았다.

소수자이고 질서 배척자였으니까..탐욕스러운 기득권 세력에게는 눈에 가시였을 것이다.

그러니까..그들 탐욕세력들은 히피족의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자꾸 두드러지게 드러내면 되었다.

그러면 그 이후로는 대중들이 알아서 배척하고 마녀사냥을 해 줄 것임을..그들은 알았고 그렇게 했다.

 

모르겠다..소수자의 연대감..긴장감..그런 것 때문에 더 끌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나와는 일단 시간대가 안맞았다.

내가 커서 예전에 봤던 그들을 찾았지만 그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다.

머리 깎고 돈 벌러 월스트리트로 취직하러 갔다던가. 

나 보다 10-20살 더 먹은 그들의 젊은 날 한 때의 객기였단 말인가.

20세기 중반의 잠깐의 유행 정도였단 말인가.

동양의 청년들이 휴매니즘적인 이데오로기에 청춘을 불사르다가 결국 그들이 혐오했던 이기적 제도권의 포로가 되고 녹아들면서 귀속했듯이,미국의 히피청년들도 모두 이상과 자유를 버리고 나포되어 종적을 감추게 된 짧은 트렌드였나보다.

순수를 포기하고 훼절하더니 그중 일부는 자본주의 포교의 전위대로 변절하기도 했다.

 

그들이 떠난 빈자리에,히피족이 되기로 한 나는 뭔가.

낭패 당혹감 외로움....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동경하면서 살게 된 게 그때부터다.

그 이후,탐욕의 침략군에 저항하며 내 것을 지키고 싶었던 세월을 살아왔다.

당시 히피계에 발도 들여놓지 못했고 호적에도 올리지 못했음에도 히피나라의 부활을 꿈 꿔 왔다고 할까.

 

 그 이후 수 십년 동안을 내 조국 히피나라..[인간성회복자연회귀]나라의 간첩이 되어..내 조국의 이상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했다. 

그게 오랜동안 이 어설프며 못되먹은 시스템의 세상에서 암약하게 된 근본 이유이다.

 

내 공작활동은 너무 은밀해서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았다.

현실에 패퇴한 실패자가 자기 합리화의 방편으로 간첩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에 그런 뜻이 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며 걱정했던 소심한 간첩.

[내]조국은 망해 버렸는지 나를 찾지 않았으며 당연히 지령 따위를 받은 적도 없다.호적도 없었던 처지였으니 뭐.

 

그런 나라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이따금 느낄 수는 있었다.

체 게바라의 얼굴을 이미지화해서 티셔츠에 프린트하고 다니는 젊은애들을 보면..아련한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뿐인가.[자유]의 이미지로는 [내]나라만 한 복색이 없더군.

요즘 젊은애들은 빈티지 히피룩을 좋아해서 젊은이들의 거리에는 전부 그렇게 입고 다니고 있다.히피족들이 살았던 것보다 훨씬 긴 세월 동안 유행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자유]와 [인간성회복]이 그냥 겉치레 멋일 뿐이다.

본래의 의미나 정신은 쏙 빼고 그냥 옷차림만 흉내내는 모양새인데,물신주의의 화신들이 그러고 다니는 거 보면 참 그렇다.

요즘 애들 표현으로 손발이 오글거리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나는 공작원으로서 그다지 똑똑하지도 능력이 출중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또한 주의 주장 신념이 확고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그 동안 외로웠었던 것도 사실이다.

점 조직이라서 서로 알아 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꽤 많은 공작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데..온통 천지사방에 사납고 탐욕스런 적군과 반동분자들만 우굴댔었었다.

너무 외로움에 지쳐서..얌전하고 소심하게 암약하다보니 내 스스로 내가 위장간첩인지 자꾸만 까먹으면서 살아왔고..

독이 든 미끼인지 알면서도 이 시스템의 달콤함을 즐기며 살아왔다.그들에게 물들기도 했다.

오열(60년대 반공포스터..간첩과 오열은 가까운 경찰서에 신고...할 때에 5列)로서 조직을 만들고 적에게 강하게 대항하는 그런 적극적인 활동보다는 기껏 경미한 사보타지 공작으로 일관했다는 점들이 아쉽다.

 이 시스템 안에서 좀 더 과감하게 [내]나라를 알리고 선동하고 내 스스로 그 세상을 구현하려는 적극성이 모자랐다는 것이다.알바 뛰듯 한 간첩.

그냥 이 시스템을 흉보고 깔보고 냉소를 날리는 식의 활동으로 한..극히 소극적인 공작이었다.

안일함에 중독되어 살면서 어디 강력한 투쟁정신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결국,실패한 간첩이라는 뜻일 게다.

자생적 간첩이면서 어영부영했으며 부끄럼 타는 간첩..외로움에 약한 간첩..의기소침 소심한 간첩..그래서 결국 실패한 간첩.

그리고 무엇보다도..공작대상인 반동분자들의 탐욕에 부지불식 어느정도 오염된 간첩이라는 뜻이다.

 

나이 먹어..이제 공작원 생활을 접었다.자격지심도 그렇고..그러나 좀 오염된 간첩이지만 그렇다고 변절하거나 전향한 것은 아니다.그냥 냉소적인 체제불만 세력쯤으로 구분 되어지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체제를 위해할 능력도 없는 비전향 장기수에게,독립가옥 하나 마련해서 말년을 보내라는 안기부의 배려가 있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오랫동안 내가 동경해 왔던 내 나라의 꽃과 식물을 나의 안전가옥에 심으려 한다는 거지 뭐.

비전향 간첩으로서 세상을 뒤집어 엎는 사업을 하지 못하고..결국 좌절한 장년 나이로 홀로 남아 있게 되었고..남이야 어찌되든 상관 않고..나 혼자 내 둥지를 틀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되었다.

 

시골 내려가서..최대한 자급자족..내 삶의 건덕지들을 직접 챙기며 살아가려고 한다는 이야기다.

내 순수는 손상을 입었지만..그 옛날의 고국은 나의 이상이며 그 모습은 지금도 너무 아름답다.

[내]나라의 건국이념인 자연회귀->자급자족-> 자유와 인간성회복들..그것들을 나 혼자 그리워하면서 살고 싶다.

 

후세의 것 까지 끌어땡여와서 무조건 성장해야 하는 거대한 탐욕의 군상들..

승자 독식,무한 경쟁의 사나운 전쟁터..

눈 속임과 착취가 자연스러운..야비한 매트릭스의 굴레..

패권황제 미국놈들만의 덕목인지만 알았는데..이제는 이 꼬붕나라도 '소비가 미덕'이란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시스템의 문제는,구성원들이 할 일이 없어서 권태스러워 하다가 좌절하게 만드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아닌가.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애써 구하는 일들을..전혀 할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라는 점.

그래서 삐뚜러진 욕구가 대세가 되었고,그것을 이용하는 간교한 매트릭스가 군림하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점.

강한 경쟁심으로 무장하고 살아가는 사람들,그들은 거의 모두..결국 불행하기 마련이라는 점.

 

히피족의 나라의 부활과 독립을 기원한다.

그러나 이 세상이 뒤엎어기를 바라지는 않더라도..

히피의 정신이,지친 사람들 맘에 깃들어서 사회의 큰 믿음으로 도도한 물결이 되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아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라도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헛헛한 웃음이 나온다.요원한 일일 것이다.그러나..

좌절의 끝에서 마지막으로 지푸라기처럼 웅켜 줘 본다..희망 꿈 용기..그런것들을....

 

2010년 한 해의 끝 날에 부쳐..미약한 힘으로나마 기원한다.

천천히 작게라도..어제보다 좀 나아지는 세상이 만들어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