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오만

사자는 얼룩말을 존경한다 ('02./ 5. )

산책길에서 2004. 2. 6. 17:26

사자는 얼룩말을 존중한다.
(2002.5.  )

 

 

요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분업화시대이고 대량생산 시대라서..

직업이 나눠져 있으니..
우리의 직업이 도살장의 백정은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의 식욕과 생활습관은 도살장의 백정과 다름이 없다.직접 손에 피만 묻히지 않을 뿐이다.


그것도..먹지도 않을거면서 괜히 심심해서 마구잡이로 죽이는 광란의 백정이다.
아무리 동물이라고 해도 하나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최소한 적어도 진지함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오늘 저녁 식사는 내일 한마리의 생명을 거두는 일에서
더 나아가 쓸데없이 괜히 한마리 더 목숨을 빼앗는 사형선고의 자리가 되었다.
사람의 식사도 진지함을 배워야 한다.

 

이쪽에서..
남의 살(肉)을 아무렇게나 먹고 남겨서 버리면..(넉넉히 시켜 먹고 남기는 것이 좋아 뵌다고 한다.)

그럼 저쪽에서는(수요와 공급의 원칙이래나 뭐래나..)
그 살을 가진 동물 한마리가 필요없이 또 죽임을 당한다.

고기 재고를 충당하기 위해서..미리 죽임을 당한다.

저장되었다가..다른 수요처에 팔린다.


그래서 살 찐 우리의 몸뚱아리를 사우나 찜질방에 가서 뒹굴기도 하고..그렇다.

최소한의 양심을 생각케 한다.


사자가 얼룩말 무리를 발견하면 그 무리 중에서 병약한 놈을 한마리 찾는다고 한다.
사냥의 목표물을 정하고는 용이주도하게 최대의 정성으로 약한 놈을 포획한다.
그 진중함은 최선이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로 인용되기도 한다.
그 먹이에 대한 사자의 생각은 신앙과 같다.
사자는 그 먹이감들을 숭배하는지는 알아낼수 없지만 최소한 존중은 하고 있는것 같다.
그리고 좀 더 많은 무리가 되도록 기원할 것이다.
사자의 사냥은,농부가 더 많은 소출을 올리기 위해서 부실한 싹들을 솎아주는 것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배를 채우고 난 뒤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은 자연의 법칙을 순응하는 것일 게다.그 잔량은 또 다른 포획자의 몫이니까...
나중에 배가 고플 일이 있을 것이다라는 걱정을 할 만도 하지만 미리 잡아서 저장하거나 나중을 생각해서 더 먹어 두는 일이 없다.
그것은 깊은 의젓함이다.
어떠한 천재지변이나 자신이 부상을 당하는 일이 있다면 사자는 굶어 죽게 되어있다.
사자의 모습은 남의 생명을 빼앗는 약탈자의 그것이 아니고 대자연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진지함이다.
살육이 아니고 그건 정성스런 균형 맞추기이다.
섭리와 같은 장엄함이다.

나중에 먹을 것을 대비해서..멸한 생명을 미리미리 키우는 것을..사자는 하지 않는다.

 

시베리아북쪽 툰드라 지역에 사는 유목민도 그들의 유일한 먹이감인 순록(馴鹿,북극권의 큰사슴)에 대해서 경외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너무 추워서 경작이 되지 않는 지역에 사는 그들은 요즘도 그 옛날의 생활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
이동하며 사는 순록떼들은 따라..
순록을 잡아먹고 사는 그들도 이동하며 살아 간다.
다행히 순록떼를 만나서 한마리 잡으면 그들을 잡아 먹고 살아 날 수 있다.
순록떼를 만나지 못하면 음식을 먹지 못해서 끝내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사자와 마찬가지로 여러마리를 잡아서 갈무리하지는 않는다.
순록떼를 계속 따라잡거나 순록을 가두어 둘 만도 한 데..그러지를 않는다.

사냥이라는 행사는 그들에게는 축제이고 신앙생활이다.
그들의 삶은 그 자체가 그들의 신앙 생활이다.
우리처럼 사회생활.경제생활 따로,신앙생활 따로 하지 않는다.
그들의 신앙은 순록이다.
잡아 먹으면서도 그것을 존중하고 신성시하는 것이 경이로롭다.
실제로 그들은 순록의 뿔을 걸어놓고 신앙의 대상으로서 숭배하고 기원을 올린다.

살아가면서 먹고 생존하는 일이 그다지도 심각한 지경이라면
먹는 음식이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인도네시아 어떤 섬의 원주민들도
그들이 섭취할 수 있는 유일한 단백질,지방의 공급원으로서 고래를 숭배한다.
어떻게 하면 고통없이 빠른 시간안에 고래를 죽일 수 있느냐가 그 사냥의 최대 목표이다.
그것은 한 동물을 포획하는 사냥이 아니라 진지한 의식(儀式)과 같았다라고 어떤이는 전하고 있다.
말라 비틀어진 그들은 최소한의 동물성 영양분을 섭취하게 되고..아마 고래의 몸이 자신의 몸과 합일을 이룬다고 생각하고 있나보다.
숭고한 분위기라서일까..그 작은 보트로 사냥을 나서는 몇사람에 대해 고래는 전혀 반항하거나 인간을 해꼬지 하지 않는다 하지 않는가!


그리고 오늘..
이 도시에 사는 것이 죄스럽다.
내 생존은 많은 생명의 희생 위에 기반되어져 있다.
마구잡이로 생명을 멸하는 살육의 마당에서 작고 외로운 거부의 몸짓을 지어 본다.
나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욕 될까..깊은 상념을 지어 본다.
그러나 나 자신도 알아 차릴 수 없는 작고 미온적인 잠깐의 몸짓이었다.
그냥 어쩔 수 없다고 체념을 하는 게 낫다.
그리고는 비겁함 속으로 잦아든다. 
이따금 불현듯 깨닫고..소스라치게 놀랄 뿐이다.

 

생명이란 귀중한 것이다.
하다못해 식물에게도 마음,감정이 있지 않을까..하고 갸우뚱하는 세상이다.
그래서일까..우리가 흔히 아는 채식주의자의 개념이 세분화되어있다는 말도 들린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이 만든 말은 아닐 것이다.
탐욕과 잘못된 시스템으로 인간은 헤어나오기 힘든 굴레에 빠져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의심해 볼 수 있다면 그런류의 사고의 전환도 그다지 낯선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하나의 존귀한 생명이라면..내 의지로 다른 생명을 멸할 권한이 없을 것이다..라는 인식이 그 단초가 되었을 것이다.

남의 살(육식)을 금하는 것이 일반적인 채식주의로 알고 있지만,더 나아가..
계란을 금하기도 하는 단계:그것도 움직이지는 않고 있지만 하나의 동물생명임이 확실하니까..
거기에 꿀까지 금하는 단계:동물의 음식을 빼앗는 일이니까..
식물의 뿌리 줄기까지를 금하는 단계:혹시 감정이 있을 수 있다는 그 생명을 앗는 일이니까..
식물의 열매를 따먹는 일까지를 금한는 단계:그것도 생명이니까..
식물의 이파리도 금하는 단계:그 이파리를 따서 먹으면 하나의 생명이 죽을 수도 있으니까..
떨어진 열매도 금하는 단계:떨어졌지만 생명이 있는 것이고 또 다른 생명을 만들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럼 무엇을 먹고 살단 말인가?
죽은 식물만 먹고 사는 단계:이것이 채식주의의 완결판이다.

 

그런 채식주의자가 되는 일은 못한다하더라도..
음식을 숭배까지는 않더라도..
모든 살아있는 생명을 존중하고..
음식을 귀히 여기고 덜먹는 일..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이따금 깨닫고 깜짝깜짝 놀랄 것이 아니고..

일상에 작은 실천 하나라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