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오만

육신의 허기는..정신을 고양시킨다('03./ 7/18)

산책길에서 2004. 2. 8. 13:46

 

1.사람은 '부족함이 체질'


사람은
풍요함에는 취약하고
모자람에는 쉽게 적응을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적응 정도가 아니고
청빈과 인고가 사람의 체질에 맞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창조주의
교훈적인 메세지를 엿 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모르겠군요.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사람의 몸도 마음도..
부족한 것에 더 어울린다는 증거가 꽤 있을 겁니다.
적당한 예가 될 지 모르겠습니다만..
시간성을 부여해서..기억 속의 나를 관찰했으면 합니다.
기억 속에서는..
의식주 환경이 열악했지만
오히려 지금보다는 그때가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그 만큼 삶이 진지하기도 했구요.
모든 사람이 가난했고 부족했습니다만
그래서 인간적일 수 있었던 것 아닌가 합니다.
정겨웠던 사람들이 기억 속에 살아 있습니다.
나의 가난..아쉬움..괴로움..
모두 애틋한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그렇게..내 유년의 추억은 모두다 아름답고 귀합니다.

그런데
좀 의외의 현상을 발견합니다.
지나고 나서 보니까..
열악한 처지의 추억이 더 빛나고 재미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더 소중하게 떠오릅니다.

풍요함의 기억은 별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없이 못살던 시절의 추억이 훨씬 선명하고 아름답습니다.
힘든 시절이 더 좋은 느낌으로 남아 있습니다.
절실함이 깊어서 오래토록 기억되는 이유도 있겠습니다만..
좋았던 시절은..
기억이 되어졌다고 해도 밍밍해서 별로 감흥이 없고..
기껏해야..
옛날이 좋았는데..하며 한탄하는 데에나 쓰임이 됩니다.
나쁜 버릇만 키웁니다.
그렇게..풍요의 기억은 좀 부정적 이미지입니다.

열악한 환경에 견딘다는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아픔의 기억이
오히려 세월따라 곱게 저장되어
사람의 정신을 밝게하고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못먹고 못살아서 아쉬웠던 그 모자람에 대한 기억이
내게는 정신적인 재산이라는 의미인가 합니다.
남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자랑하기도 뭐합니다만..
힘들 때 옛날을 회상해 보고 혼자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단순한 기억의 차원을 넘어서..
남이 모르는 나의 재산이요..축복이랄 수 있습니다.
그 동안 몰랐던 것이..
내 부모님은 내게 그런 정신적인 유산을 남겨 주었던 것입니다.
만약 풍족한 어린 시절을 살아서 지금에 이르렀다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애닯고 시큰시큰한 그리움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명료함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풍요한 시절의 나는 지금 내 기억에 없으니
이미 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지난 시절..기억이 나질 않는다면
지금 그건 없는 것과 같은 것 아닌가요.

바꿔서 이야기 한다면..
우리의 정신은
부족하고 힘들 때에만 제대로 작동하는 모습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부둥켜 안고 절절해 하는 것이 사는 모습이고
문제의식없이
배불러 나른해 할 때는 죽어 있는 것고 같다고 보고 싶습니다.
사람은..
'부족함이 체질'이라는 이야기이겠지요.

차제에 다른 이야기 좀 더 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사람은 오묘하게 만들진 존재입니다.
인간이라는 소프트웨어는
역경에 처했어도..어떻게든 잘 살아갈 수 있게 프로그램되어져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구조인가 합니다.
기발함이 불가사의하다고 할까요.
찝찌름한 기억은 될 수 있으면 빨리 망각되어지도록 조작되어져 있습니다.
왠만하면 예쁘게 채색되고 돋워져서 고은 기억으로 저장되게 됩니다.
하이테크 고품위의 소프트로 되어져 있어서 놀랍습니다.
그런 것들이 창조주의 흔적이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참고 잘 살 수 있습니다.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추억이 예쁘니까요..
웃음으로 옛날을 회상할 수 있어서 그렇구요.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사니 그렇습니다.
앞으로 올 날이 거의 암담하기는 하지만
왠지 좋아 질 것이라는 '희망'을 자연적으로 지득하게 되니까 그렇습니다.
사실..그 '희망'이라는 것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건 무조건적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 만든 제도나 인습에 문제가 많아도..
뭔가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서..
각각의 인간의 삶을 재단하는 정신적인 무엇이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인생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안보이는 부분이 더 많이 숨어 있음을 눈치채게 됩니다만.....

사람사는 세상..
인간 윤리는 그 부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야지요.
태생적으로 인간 사는 세상은 규범적인 구석이 있습니다.
얼핏 아닌 것도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꽤나 교훈적인 수수께끼가 도처에 숨어 있어요.

인생은..미션 게임과 같습니다.
현상적인 것과 정신적인 여러 요소들 감안해서 게임을 이어가야 하는데..
그 요소들이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다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힘들여 노력해서 살아 가야 하고..
이따금 고도의 정신적인 판단을 요하는 과업이 주어지기도 하지요.
그 판단부분은 꽤 교훈적이고 신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허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노력과 판단..그 인과 관계가 꽤나 절묘하다는 생각입니다.
옆길로 잠깐 샜었습니다. 다시 돌아 갑니다.

자긍심..자존심이라는 멋진 덕목도 부족함에서 얻어집니다.
거만하고 배타적인 오만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자기 존중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자신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심을 손쉽게 얻는 방법은
시련을 스스로 극복하고
욕구를 억제했을 때입니다.
자신에게 충실했다는..시련을 극복했다는..생각은
자신감을 주고 옳음에 대한 확신도 심어 줍니다.
그런 자부심은 건전한 사람의 대표적 특성이며
그것을 근본 상식으로 해서 옳음의 사회성이 만들어 지겠지요.
한 사람에게 있어서 자부심이 없다면
세상을 안정적으로 살아가기 곤란할 겁니다.
아픔과 부족함이 주는..우리 마음의 선물인가 합니다.

반대로
아픔을 회피하고..욕구에 대한 절제가 없이 산다면
삶에 대한 확신이 없이 허물어지는 것에 익숙할 겁니다.
비열함과 허무와 냉소의 습관이 생깁니다.
그것들은 불온한 사람의 대표적 특성입니다
음습한 퇴폐성이 그런 것과 어울립니다.


그뿐 아니라..
부족함과 역경은 사람을 꿋꿋하게 하게 합니다.
인간 삶의 좋은 덕목들과 친하게 합니다.
참을성이나 관용이라는 멋진 덕목은 물론이거니와
열정이라는 귀한 덕목도
용기라는 남성스런 덕목도
연민이나 배려심이라는 이쁜 덕목도
아픔과 모자람의 경험으로 얻어지는 것들입니다.
아픔을 참아내고 모자람에 아파해 본 느낌이
그런 좋은 덕목을 살지우게 하는 요인이 될 것입니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실패하거나 고생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만
어쩔 수 없이 고난은 있게 마련이고
또한 그 고난은 사람에게 그다지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세상이치가 꽤나 재미있는 모양새인가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부러 고생하러 떠나기도 하지요.
뮤료한 일상에서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으러
작은 고행의 길로 들어 서기도 합니다.
삶이 힘들고 마음이 흔들릴때는
오히려..일부러 고생을 해 봅니다.
요새도 그런 것 있나 모르겠군요.
가나안 농군학교에 입교해서 한 달 동안 혼이 나게 되면
약발이 먹히는 것 같더라구요.
해병대에 입교해서 일 주일동안 갯뻘을 빡빡 기다보면
사는 것이 지루하지 않을 것입니다.

돈 들여 부러 고생하는..그런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런 지루함이 좋은 삶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이 좋아하지 않고 있음이 확실하니까요.

문명의 편리가 발달해서 사람들은 할 일이 별로 없어져 편하다는 것이
오히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게 되었다는 역설이 가능한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가요?
운동을 일 삼아서 하고..하루 꼬박 소모해서 골프치러 다니고..
각종 레져를 즐기고..특이한 도락에도 전념하고..
하다못해..좋아 하는 연애인 집 문 밖에서 밤샘하고..
그렇게 희안한 일이 많습니다.

하여튼..
사람은
모자라고 열악한 환경에 잘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아니..오히려 부족함이 더 어울리는 놀라운 피조물입니다.
그건..사람이 갖는 어쩔 수 없는 정신적인 속성이 아닐까요?

내 가난이 내게 아름다운 추억의 정신 세계를 주었고
지금 재물에 대한 신선한 감각을 갖게 했습니다.
좀 치사하고 쪼잔한 일입니다만
작은 재물,작은 얻음에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지요.

가난한 사람이 느끼는 1만원어치의 효용과
부자가 느끼는 100만윈어치의 효용의 크기가 비슷합니다.
어떤 이가 느끼는 100만원어치의 기쁨을..
1만원으로도 그 만큼 느낄 수 있는 능력..
그런 능력이 자연스럽게 얻어질 수 있음이 또한 놀라운 일인가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한 게지요.
그래서 세상은 미치고 팔딱 뛰는 사람 없이..
그럴듯한 모양새로 역사를 만들면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나 봅니다.

 


2.풍요의 함정


그러나
모자라는 것은 잘 견디게 되어진 반면..
과하고 넘치는 것에는 취약한 게 인간입니다.
과유불급이라도 했던가요.
문자 한 번 써 봅니다.

사람에게는 욕구라는 소프트웨어가 주입되어져 있어서
태생적으로 끝없는 탐욕을 부리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막상 창조주의 의도는
인간 스스로 그리 하지 말것을 과업으로 부여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모자라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셈입니다.
"생겨먹은대로..그냥 내키는대로 살지 말아라"
"남아 돌아도..좀 모자란듯이 살아야 한다."

욕구를 억제하지 않으면 절단나게끔 인간의 몸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어요.
한없는 탐욕은 몸을 망가뜨립니다.
탐욕 끝에 비만해진 우리의 몸은
의욕을 잃게하고 숨이 가빠서 사는 것이 힘들어 집니다.
천형(天刑)처럼 암(癌)이 생길 수도 있고
성인병들이 생겨 고생하고 일찍 죽게도 됩니다.
"내가 뭐라고 하였느냐..그러지 말라고 했지?"

절제가 없는 생활은 우리의 정신도 황폐하게 만듭니다.
세상에 신선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중독..
헤어나오지 못하는 중독..
쾌락은 아편처럼 단위를 높여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쾌락이 아닙니다.
유치하고 싱겁고 지루할 뿐입니다.
그러니 한없이 쾌락의 단위를 높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맛을 익히 알아차린 사람은 그것에 벗어나기 힘듭니다.
절제하지 않는 쾌락 추구는 거의 파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습관과 중독(심각한 습관)의 노예가 되는 일은 악마의 영역입니다.
"결국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구나...."

쾌락을 탐하도록 만들어 놓고는..
막상..
그대로 살면 가만두지 않고 절단내는 모양새입니다.
함정 단속인 셈입니다.
함정을 만들어 놓고는
"너!! 딱 걸렸어..."
어떤 심통맞은 노인네의 장난이라고 해도 될까요.
요샌 경찰도 함정 단속을 하면 욕을 먹는데..하물며....
모르겠습니다.
그 노인네를 만날 수 없으니 물어 볼 수도..따질 수도 없고..
딱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 밖에.....

객적은 이야기 좀 더 할까요.
그런 이야기를 하실지도 모릅니다.
"만들어진대로 살면 무슨 재민겨..
네 인생인데..
네 스스로 모색하고 운영하는 맛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래야 내가 나중에 점수도 매길 수 있지."
너그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나온 것이..시험치르러 온 것 같기도 합니다.
기회 있으면 한 번 물어봐야겠습니다.
"그 놈의 점수는 꼭 매겨야 합니까?"
"그렇게 우수반 열등반으로 나누면..행복하십니까?"
"함정 단속을 하시니까..행복하십니까?"
야단 맞을지 모르니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3.절제하는 일이 정신 추구의 일


욕구를 억제하고 나눠 베푸는 삶이
잘 사는 삶임을..
창조주는 우리의 몸 시스템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절제만이 해결책입니다.
고행 수준이 아니고
살아가면서 솟아나는 작은 욕구들을 최대한 억제해야지요.
최대한 억제하는 일이 우리 삶에 맞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구원의 길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절제만이 우리의 머리와 눈을 맑게 합니다.
우리의 정신과 영혼이 살아있게 합니다.
청빈과 인고의 삶일 때에야 사람의 정신이 살아 있습니다.
부족함을 느낄 때 사람은 사람답게 인간적이 될 수 있습니다.

육체의 허기가 있어야 정신이 살고
부족함을 느껴야 활기가 생깁니다.
부족함에..우리 몸 세포 하나 하나가 의욕으로 번뜩일 때
우리의 몸은 물론..
정신과 영혼도 가장 그 무엇에 가까이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몸뚱이가 편하고자 하는 욕구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것이 삶에서 승리하는 일이겠지요.
썩어질 육체에 안달복달하면 패배하게 되는 것이고
그 보다는 정신과 영혼을 살지우는 것이
승리하는 삶이라는 이야기인가 합니다.
육체와 정신은 서로 반대 입장에서 우리와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인생을 정신적으로 신랄하게 살아내자!!!" 그런 다짐을 하고
맨날 고민하려고 한다고 해서..사람은 정신적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개발한..
진지한 정신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은
의외로 육체적인 방법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육체를 고통시켜서..정신적인 세계와 접촉하는 방법.....

그래서 심각한 정신 추구를 말할 때..
'싸운다'라고 표현합니다.
육체의 욕구가 우리가 정신적인 상태가 됨을 방해하기 때문에
치열하게 사투한다느니..자신과의 처절한 투쟁을 한다느니..
그런 말이 나오게 되었나 봅니다.


그는 마케도니아 아토스산으로 여행을 갔다.
수도원이 많기도 하거니와,
여자뿐 아니라 암소나 암탉등 모든 암컷을 배척하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는 그 거룩한 산의 어느 골방에서 6개월간 면벽(面壁)기도를 한다.
영혼과 육체의 수련을 통해 구세주와 직접 접촉하려고 하는 것이다.
정신적인 추구를 위해..
고독을 경험하고..육체의 유혹을 견뎌냈다.
그는(19세기)
평생을 치열하게 정신적인 투쟁의 삶을 살다가..
그렇게 갔다.


예전 사람들은 꽤나 정신적인 구석이 있었습니다.
치열한 정신적 추구가 있었지요.
요즘과는 다른 모습일 겁니다.

옛날에는 지나치게 정신적인 경향이 있어서 문제였다면
지금의 세상은 너무 정신적이지 않아서 문제일 겁니다만..
그 이유는..앞에 이야기 드린 대로..
육체의 편함이..정신을 누르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면벽(面壁)기도란
석굴에 들어가 최소한 죽지 않을 정도로 먹으면서
하루종일 말 한마디 안하고
벽앞에서 벽을 마주 보고 앉아서 기도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를 못살게 들들달달 볶는 일입니다.

어떻습니까..정신적이지 못한 세상..
언제고
모두
시간 한 번 내서
면벽 기도 여행이나 떠나시지요.

우리의 삶이 육체에 갇혀서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영원에 대한 갈망..
진실에 대한 욕구..
정신 추구가 있어야 겠지요.

 


4.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면..


삶은 미몽입니다.
그가 구세주를 만나려 한 이유는
자유를 얻기 위함일 것입니다.
"어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옵니까?"
회의함에서 벗어나
맞부딛혀서 그 확신을 얻기 위함일 것입니다.
미몽..
불확실하고 의혹 투성이의 삶을
명료하게 정의하지 못하면
사람은 갈 곳을 몰라 할 것이고
그것은 어둡고 긴 속박일 것입니다.
사람은 주로 그렇게 살다가 갑니다.
자유를 얻기 위한 많은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사람의 이성과 지혜로는..인생의 해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21세기인 지금도
이성과 지혜가 더욱 발달했지만
삶은 여전히 미몽입니다.
밤은 너무 어둡고..
내 이성과 지혜의 헤드라이트는 빛이 약해서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릴까?
옆에는
눈을 감고..앞 사람의 손을 의지해서 나아가는 긴 행렬이 있습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확신에 찬 행렬입니다. 

이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은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오해하는 군상이 더 많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너무 중요하고 버겁기도 하거니와
뿌리부터 부정해 가며 고민하기에는..
대책없는 시간 낭비라는 것을 깨닫게 된 때문일 겁니다.

사람들이
정신적인 속성을 버리고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것에 더 신경 쓰게 된 연유가 그런 거 아닐까 합니다.

좀 더 정신적인 추구를 위해서
육체를 갈구는 일을 하는 것이 무의미해 보이는 거겠지요.
부족함 속으로 들어가 정신적이 되어서 괴롭기 보다는
'오늘도 즐겁게...'살고 싶을 뿐입니다.
 
나는 아무런 확신도 없습니다.
가위에 눌리듯..어둠이 너무 무섭습니다.
이곳에서 나의 의미는 무엇이며
나는 왜 소멸되어야만 하는가.
이 모호함과 막연함을 어찌해야 할지...
두려움이 거대한 무게로 내리 누르고 있습니다.

사람들 틈에서 벗어나
아토스산의 석굴을  찾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수근대는 구원에 대한 소문에
나는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최소한 다른 모색이라도 있어야지요.
내 속으로 들어가 앉아 있기라도 해야 합니다.
나는 내 속에 들어가 내게 가장 충일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나는 부족함과 친하고
아픔을 기꺼이 감내해야 합니다. 
내 신형의 욕구를 하나 하나 꾹꾹 눌러 없애고
정신의 산란을 불에 태워버려야 합니다.
구원과는 관계없다하더라도..
명징한 정신 세계를 가지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억눌러 참고
아주 조금씩만 떼어먹고 살아야지요.
그렇게..
은둔의 고행자를 흉내내야 할 겁니다.